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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1991년 열사 투쟁
심우기 (시인,대학강사)  |  view : 529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1991년 열사 투쟁

심우기(1991년 열사 투쟁 30주년 기념사업회 공동대표)


2021년 올해는 1991년 열사 투쟁 30주년이 되는해다. 이를 기억하고 추모의 마음과 기념하기 위한 위원회가 결성되어 관련 사업과 평가 등 코로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진행하고 있다. 필자도 경원대학교(현 가천대학교)의 송광영천세용 열사 기념사업회 회장으로 공동대표를 맡아 관련 사업의 일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더욱 책임과 기억, 그리고 미래에 대한 물음과 전망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기에 관련 글을 쓰며 그 시대를 경험 한 이와 알지 못하는 이에게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의 사건을 끄집어낸다. 이 열사들의 투쟁은 미완의 승리였으나 결코 끝난 것도 승리도 실패도 아닌 현재 진행형의 사건임을 밝히고 싶다.

 

1991년 4월 당시 강경대 학생의 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열사투쟁은 당시 정권에 대하여 죽음으로 저항한 투쟁이었다. 타살, 분신 등 온몸으로 투쟁한 열사들에 대하여 당시 정권은 속칭 분신 배후를 운운하며 김기설 열사 유서대필 사건을 조작하고, 당시 민족민주운동세력을 파렴치한 패륜아로 몰아갔다. 이후 계속되는 열사들의 투쟁에 대해서도 분신 배후, 죽음 굿판 등을 운운하며 열사들의 정당한 투쟁을 평가 절하하고 국민들과 괴리시키기 위한 여론공작을 자행하였다.

 

87년 민주화운동을 경험하고 공유했던 91년은 누군가에게는 트라우마로, 누군가에게는 실패한 투쟁으로 책임감과 부채감이 청산되지 못하고 있다.
이제 30년, 91년의 열사 투쟁은 실패한 투쟁이 아니라 이후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투쟁으로 온당하게 재평가되고 재조명되어야 한다. 91년 5월은 80년 5월 광주항쟁, 87년 6월 항쟁의 연장선에 서 있다. 당시 학생 노동자 시민들의 투쟁은 18분의 열사 외에도 계속적인 투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묻히고 잊힐 수 없는 그 항거를 기억해내고 소환하여 한국 민주주의 발전과 계승을 꾀하고자 한다.

 

1990년 1월22일에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 3 사람이 3당 합당을 선언했다. 3당 합당으로 민자당이 탄생했는데, 원내 의석의 대부분인 214석을 차지하는 등 당시의 정국 주도권을 장악한다. 당시 집권하던 노태우 정권은 79년 12.12 군사 반란(쿠데타)의 주모자 중의 하나로(대표적 인물이 전두환 민주 헌정 질서를 파괴하고, 민중들의 민주주의 요구를 군대의 물리력으로 민간인 학살과 구금, 폭행 등 한 자) 국민을 억압한 범죄자로서 대법원의 무기징역까지 확정받은 독재정권과 독재자였다.

 

1990년 7월14일 방송관계법이 날치기로 통과되고, 1991년 5월엔 국가보안법과 경찰법 등이 날치기에다 기형아와 불구의 병의 원인이 되는 페놀 원액 30톤을 낙동강에 무단투기 방류하여 대구 부산 마산 창원 등에 식수를 오염시킨 그 피해가 대구는 70프로 를 본 대규모 두산 기업 환경오염 사건인 페놀사태, 한보그룹의 수서 택지 특혜분양 사건과 고위 관리들의 부정부패, 물가폭등으로 전국민적 분노가 커지고 있었다. 2021년 오늘날 몇 가지 사건과 이리 오버랩되는지 역사는 반복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의 미얀마 민중 저항과 투쟁을 보면 5.18광주 민중항쟁의 고립과 최후 투쟁 등이 생각나 눈물이 난다. LH 투기 사건과 부동산 폭등과 코로나로 인한 경제 위축, 고위 관료와 정치인의 부정과 부패, 내로남불 등 이렇게 역사는 더러운 것들이 반복되고 있지 않는지.

 

다시 91 시대로 돌아가서
당시 노태우는 공안 합수부라는 폭력적 기구를 통해 공안통치, 보안사(군 정보기관)의 민간인 사찰 등 폭력적 방법으로 국민의 분노를 잠재우려 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민주노조 설립 요구 등의 자주적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도 심해지고 1990년 11월에 구속된 양심수가 1259명에 달했으며 노동자 파업 현장과 대학교에 수시로 경찰들이 투입되어 진압하였다

 

그런 와중에 명지대학교의 당시 총학생회장인 박광철이 시위 참여후 학교로 돌아오던 중 경찰에 의해 연행되고, 2일이 지난 후 1991년 4월 26일 총학생회장 석방을 위한 시위가 진행되었고 시위가 격렬해지자 경찰이 진압을 시도한다. 이 과정에서 명지대 1학년 학생인 강경대가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폭력에 의해 사망하고, 이후 이에 대한 항의와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도중 서울에서 성균관대생 김귀정이 당시 경찰의 토끼 몰이식 진압 방식으로 경찰에 의해 깔려서 사망하게 된다.

 

진압 경찰의 쇠파이프 몽둥이 사용에 따른 전 민중적인 분노와 더불어 노태우 정권 내내 자행돼 온 폭력과 그에 맞서는 민중의 투쟁이 일대 전환을 이루는 분수령이 되는 시기였다. 해체 민자당 타도 노태우 구호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시기였다. 또한 87년 6월 항쟁 이후 미완의 혁명과 개량화된 정치지형을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과 저항이 그 기저에 깔려 있었다. 당시 민중들과 국민의 요구를 기존의 정치권력은 수용하기보다 야당의 분열과 3당 합당이라는 미봉책으로 원천적으로 국민적 개혁과 변화의 요구를 담지 못했고 태생적으로 수구 보수화 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4월29일 전남대학교 박승희, 5월 1일 안동대학교 김영균, 5월 3일 경원대학교 천세용, 5월 8일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5월 10일 윤용하 등이 분신을 하며 독재타도와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요구를 주장한다. 그러나 당시 정권은 분신 정국을 이념적 공세로 밀어붙이고 당시 서강대 총장 박홍과 김지하의 조선일보 기고 등으로 문제의 본질, 모순의 근본적 문제에 비판과 척결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이들의 희생을 모독하고 호도하여 감추기에 급급했다. 이런 독재권력의 의도를 감행하기 위해 그들은 당시 자살한 전민련 김기설 사회부장의 유서를 전민련 강기훈이 대필하여 죽음을 사주 조장하여 정권타도를 기획하였다는 식으로 호도하여 언론과 대중들에게 유포하여 불길처럼 일어나는 저항을 잠재우려 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유서대필 사건이며 이로 인하여 당사자인 강기훈은 옥고와 병을 얻게 되었고 민주진영과 학생운동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구석으로 몰게 된다. 강기훈은 후에 무죄로 판결되었으나 긴 옥고와 병으로 많은 심적 육체적 피해를 입고 살고 있다.

 

이를 반박하고 지지하기 위한 제도 정치권의 노력은 없었다. 약 60여일 동안 분신 또는 의문사 등으로 총 18분의 학생 시민 노동자 등이 사망하였고 이후에도 시민 이영순, 장상순 노동자 박창수 , 고등학생 김철수 등도 목숨을 바친 투쟁이 이어졌다. 당시 총 2361회의 집회와 시위가 있었다. 하루 4차례 이상의 집회와 시위가 전국적으로 있었으니 당시의 분위기와 국민의 분노와 저항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를 잠재운 것은 개량주의자와 기존의 정치권력이었다. 이에 대항한 것이 민중권력에 대한 요구였고 최근 돌아가신 백기완 선생의 대선 선대본이 꾸려진 이유였던 것이다.
정원식 당시 국무총리가 외대 방문시 학생들의 계란 투척 사건 이후 언론은 운동권을 버릇없는 사람으로 몰고 학생운동권을 매도하고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호도하여 대중과의 괴리와 간극을 넓혀 잠재우려 시도한다. 이는 어느 정도 대중들에게 먹히던 중당시 소비에트 공화국(소련)의 해체는 진보진영과 운동권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과 각 연방의 독립 욕구가 증가되고 보수파의 쿠데타 실패 등과 경제 낙후 등으로 인하여 고르바초프는 실각하고 옐친 등장과 함께 1991년 정통 사회주의 공화국의 맹주 소련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은 해체 된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경제난과 부패와 혁명이론과의 현실적 괴리 등은 많은 좌절과 다른 방안을 모색하게끔 하였다.
소련을 그리워하지 않는 사람은 가슴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소련 체제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사람은 머리가 없는 사람이다."
블라디미르 푸틴의 말처럼 당시 세계 양대 진영의 한축으로서의 소련의 지위는 무너지고 경제적인 빈곤과 연방의 분열은 더 가속화하게 되었고 일반 시민들의 삶은 더 피폐하게 되었다.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의 붕괴를 보게되며 진보진영과 학생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던 것이 사실이다. 이후 전선 운동과 시민운동(환경운동, 여성운동, 시민사회운동 등으로 분화되며 )등으로 분화되고 혁명에서 개혁으로 개량화되는 시기를 거치게 된다. 이후 현실 정치권에 대거 입당한 소위 386 등은 제도권 내의 기득권 세력이 되었고 30년의 구호와 현재의 모습의 차이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아직도 개혁 과제와 촛불 과제는 요원하고 미완의 숙제로 우리의 발 앞에 놓여 있다. 이것이 우리가 아직도 연대하며 노력해야 하는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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